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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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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은 1559년 2월에 태어난 군인으로,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 제후 연맹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스페인 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연합에 대항하여 가톨릭 세력을 이끌었다. 틸리는 30년 전쟁에서 보헤미아-팔츠 전역, 덴마크-니더작센 전쟁, 스웨덴 전쟁에 참여했으며, 특히 마그데부르크 약탈과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32년 레히 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그의 군사적 업적과 잔혹한 행위는 역사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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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
기본 정보
틸리 백작 초상화
본명요한 체르클라에스
작위틸리 백작
별칭갑옷을 입은 수도사
출생과 사망
출생1559년 2월, 틸리 성, 브라반트 공국, 스페인령 네덜란드, 신성 로마 제국
사망1632년 4월 30일 (73세), 잉골슈타트, 바이에른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안장 장소알토팅
군사 경력
소속스페인

{{국기|바이에른]]
군종플랑드르 군대
가톨릭 연맹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제국군
복무 기간1574년–1632년
최종 계급원수
주요 참전 전투
네덜란드 독립 전쟁안트베르펜 함락
대튀르크 전쟁해당 사항 없음
30년 전쟁백산 전투
밍골샤임 전투
빔펜 전투
회히스트 전투
하이델베르크 포위전
만하임 점령
슈타틀론 전투
루터 전투
마그데부르크 약탈
베르벤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밤베르크 전투
레인 전투

2. 어린 시절

1559년 2월, 스페인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왈롱브라반트) 틸리 성에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라반트 공국 출신으로, 쾰른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았다. 15세에 스페인 군대에 입대,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휘하에서 80년 전쟁에 참전했으며, 1585년 안트베르펜 공방전에서 승리에 기여했다.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깊어 예수회에 들어가려 했으나, 신의 적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군인이 되었다.

3. 군 경력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15세에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여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휘하에서 80년 전쟁에 참전하였고, 1585년에 벌어진 안트베르펜 공방전(1584-1585)에서 승리하는 데 참여했다. 1600년에는 헝가리트란실바니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용병으로 오스만 투르크와 전투를 벌여 5년 만에 육군 원수 자리에 올랐다. 1606년 투르크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프라하에서 루돌프 2세의 군대에 남아 복무했다.[1]

젊은 시절부터 강한 신앙심을 가졌던 틸리는 군영에서도 경건한 태도를 유지하며 항상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바쳐 "갑옷을 입은 수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608년, 신성 로마 제국개신교 제후들이 개신교 연합을 결성했다.[3] 이에 대항하기 위해 1609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를 맹주로 가톨릭 연맹이 결성되었고, 틸리는 연맹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

4. 30년 전쟁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틸리는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으로서 황제군에 합류하여 보헤미아로 진군했다. 그는 병사들을 스페인의 테르시오 진형(창병의 지원을 받는 머스킷총병)으로 훈련시켰다.

4. 1. 보헤미아-팔츠 전역 (1620-1623)

1610년 틸리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말리안 1세에 의해 바이에른의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620년부터 보헤미아에서 벌어진 개신교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틸리는 병사들에게 머스켓 총병의 지원을 받는 밀집 창병으로 이루어진 스페인의 테르시오 진형을 훈련시켰다. 약 25,000명의 병사와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여 1620년 11월 8일 프라하 북부에서 벌어진 백산 전투에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완패시켰다. 이 전투에서 틸리는 상대 군대의 반수를 전사시키거나 포로로 잡았고, 자신의 군대는 700명 정도의 피해만 입었다. 틸리군의 경미한 피해는 훈련으로 정예화되었기 때문에 적의 전열을 돌파하는 데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투로 보헤미아에서 황제에 대한 저항이 결정적으로 분쇄되었고, 프라하는 며칠 후 함락되었다.[1]

1622년 4월 27일 밍골스하임 전투에서 패배한 후, 틸리는 스페인 장군 곤살로 데 코르도바 공작(곤잘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과 합류하여 5월 6일 빔펜 전투에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바덴 변경백(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가톨릭군의 포병이 적의 탄약고를 명중시켜 폭발을 일으키면서 틸리의 승리로 이어졌다.[1]

7월 20일 회히스트 전투에서 승리한 틸리는 백작(그라프) 작위를 받았다. 두 달 간에 벌어진 3개의 전투에서 승리한 틸리는 6주간의 공성전 끝에 9월 19일 하이델베르크를 함락시켰다. 회히스트에서 패배했던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4세)은 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틸리와 슈타틀론 전투에서 싸웠으나, 15,000명의 군대 중 고위급 장교 50명을 포함한 13,000명의 병력을 잃는 대패를 겪었다. 이로 인해 독일에서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사라졌고, 1623년 보헤미아는 완전히 항복했다.[1] 1623년 2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국외로 망명 중인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 자격을 박탈하고 바이에른 공에게 부여했다.

4. 2. 덴마크-니더작센 전쟁 (1625-1629)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하고 북유럽의 주요 지도자가 되려는 목적으로 1625년 30년 전쟁에 참전했다.[1] 틸리 백작은 1626년 5월 30일 뮌덴을 포위하여 점령했지만, 카셀을 포위하지는 못했다.[1]

틸리는 1626년 8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루터 전투에서 덴마크 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틸리의 정예 보병대는 덴마크 군 전열을 향해 네 번이나 돌격을 감행하여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틸리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당시 전쟁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다르게 도망치는 덴마크 군의 절반 이상을 섬멸했다. 이 승리와 발렌슈타인의 승리로 덴마크는 뤼베크 조약을 통해 평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4. 3. 스웨덴 전쟁 (1630-1632)

1630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 독일에 상륙하면서 30년 전쟁은 스웨덴 전쟁 단계에 돌입했다. 이에 맞서 황제군은 틸리 백작에게 다시 지휘권을 맡겼다.

4. 3. 1. 마그데부르크 약탈 (1631)

1630년 7월,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 독일에 상륙하면서 30년 전쟁은 3단계인 스웨덴 전쟁으로 돌입했다. 1631년 3월 20일, 틸리 백작은 스웨덴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다. 틸리는 다른 곳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부하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그라프 추 파펜하임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두 달간의 포위 후,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가 스웨덴군에게 함락되자, 파펜하임은 증원군을 이끌고 온 틸리를 설득하여 5월 20일에 4만 명의 병력으로 도시를 공격하게 했다. 공격은 성공하여 성벽이 뚫렸지만,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약 2만 명의 마그데부르크 주민이 칼에 죽거나 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화재로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마그데부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쾰른이나 함부르크와 비슷한 규모였다. 이 사건은 틸리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7]

많은 역사학자들은 틸리가 도시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마그데부르크는 엘베강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스웨덴과의 임박한 전투를 위한 보급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틸리는 종교 개혁 운동에 극도로 반대했지만, 경험 많은 지휘관이었고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요새를 점령한 후, 최종 공격 며칠 전에 마그데부르크에 항복 제안을 보냈지만, 도시 시장은 스웨덴 구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제안을 거절했다.

학살이 시작되고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도시의 아이들은 행렬을 이루어 시장을 가로질러 루터의 찬송가 "Erhalt uns, Herr, bei deinem Wort"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는데, 틸리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틸리는 이후 황제에게 "트로이 또는 예루살렘을 함락한 이후 이런 승리는 없었다. 당신과 궁정의 부인들이 그 광경을 즐기지 못해 유감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고 전해진다.[3][6]

마그데부르크 약탈(마그데부르크 함락)은 이 사건이 가져온 정치적 피해는 심각했다. 황제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고, 독일 북부에서는 스웨덴 군이 강권 지배로부터의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그때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 온 작센 선제후국의 요한 게오르크 1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게오르크 빌헬름도 스웨덴 군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여러 외국도 황제에 대한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틸리 자신에게도,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을 실추시키고, 악명을 후세에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4. 3. 2.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

1631년 9월 17일(율리우스력 7일),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작센 연합군(약 40,000명)과 브라이텐펠트 전투를 벌였다.

틸리 백작은 본래 전투 대신 농성을 계획했으나, 부관 파펜하임의 독단적인 진격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군은 테르시오 대형을, 스웨덴군은 여단 단위의 새로운 편성을 채택했다. 스웨덴군은 대포 화력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2시간 동안의 포격전 후, 틸리는 작센군을 패퇴시키고 스웨덴군 좌익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예비대를 투입하고 보병 전열을 회전시켜 황제군에 대응했다. 이는 테르시오로는 불가능한 기동으로, 스웨덴군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스웨덴군은 화력 우위를 바탕으로 황제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로 틸리 휘하 병력은 6,000명으로 줄었고, 연합군의 손실은 3,000명에 불과했다. 황제군은 13,000명이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스웨덴군에 고용되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반 황제 세력의 첫 주요 승리였다.[1] 틸리는 작센 공략으로 전력을 낭비한 상태였고, 발렌슈타인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지원도 받지 못해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4. 3. 3. 레히 강 전투와 죽음 (1632)

틸리는 레히 강을 넘어 바이에른으로 진입하려는 스웨덴군을 막으려다 1632년 4월 15일 레인 전투 초반에 90그램짜리 아르케부스 총알에 부상을 입었다.[4] 이 총알은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산산조각 냈고, 15일 후인 1632년 4월 30일, 73세의 나이로 잉골슈타트에서 골수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상 바이에른의 알퇴팅에 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이후 틸리 백작의 군대는 본거지인 바이에른까지 후퇴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독일 중부를 제압한 후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레히 강을 사이에 두고 틸리 백작의 군대와 대치했다(레히 강 전투).

1632년 4월 15일 (율리우스력 5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공격을 명령했다. 양 군이 포격을 주고받는 가운데, 스웨덴 군의 정예 부대가 강행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어서 스웨덴 군 본대도 도하를 완료하고 황제군에게 공격을 가했다. 틸리 백작은 전투 초반에 스웨덴 군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지휘는 알트린겐이 이어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부상을 입었다. 잇따른 고급 장교의 부상으로 지휘 계통에 혼란이 생겼고, 어쩔 수 없이 막시밀리안 1세는 철수를 시작했다.

틸리 백작은 잉골슈타트로 이송되었지만, 그의 상처는 심각했고 파상풍까지 겹쳐 회복의 기미가 없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어쩔 수 없이 한때 해임했던 발렌슈타인에게 재취임을 요청했다. 병상에서 이 소식을 들은 틸리 백작은 발렌슈타인에게 행운을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더 나아가 자신의 군대 베테랑들에게 6000탈러 (통화)를 증여하는 유언장을 작성한 후, 4월 30일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 말은 "레겐스부르크"였다고 전해진다. 레겐스부르크는 제국 방어에 있어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으며, 틸리 백작은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5. 평가

틸리는 30년 전쟁 전반기에 가톨릭 세력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군사적 능력은 탁월했지만, 마그데부르크 약탈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6]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잔혹한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5. 1. 한국에서의 평가 (추가)

Magdeburg|마그데부르크de 약탈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틸리는 종종 종교적 광신과 잔혹성의 상징으로 비판받는다.[6]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틸리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한계와 시대적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그의 군사적 업적과 과오를 함께 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민의힘을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는 틸리의 종교적 광신과 잔혹성을 더욱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6. 픽션에서의 등장


  • 에릭 플린트의 SF 대체역사 소설인 1632년 시리즈에서 조역으로 나온다.
  • 마이클 무어콕의 ''The War Hound and the World's Pain'' 1장에서 언급된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틸리의 장례식이 언급되는데, 여기서 억척어멈은 "나는 이 장례식이 역사적 사건이라도 별 관심 없어. 나에게는 내 딸이 얼굴을 다친 것이 더 역사적 사건이야."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긴다.
  • 컴퓨터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 독일 문명의 특수 업그레이드 기술 '틸리의 훈련(Tilly's Discipline)'으로 등장한다. 이 기술은 보병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대신 훈련 비용을 늘린다.
  • 소설 《1632》에서 제1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와 레인 전투에서 묘사된다.
  • 소설 《사형 집행인의 딸》에서 틸리와 마그데부르크 약탈이 언급된다.

7. 후손

안토니오 옥타비오 체르클라에스 데 틸리(1646–1715)와 클로드 프레데릭 틸리 백작 (1648-1723)은 형제 자매의 후손이다. 안토니오는 스페인에서 장군이자 귀족이었으며, 그의 남동생 클로드는 네덜란드 공화국 군대에서 복무했다. 안토니오 옥타비오 공작의 누이 또는 딸로 추정되는 알베르티나는 1856년 7월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로부터 체르클라에스 공작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스페인 헤레스와 세비야에 거주하던 페레즈 데 구즈만 가문 구성원들에게 수여된 것이다.

참조

[1] 서적 Geschichte von Münden Göttingen 1808
[3] 서적 Die Märtyrer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Volume 1 1854
[3] 서적 The Great Events by Famous Historians, vol XI, A.D. 1609-1660 The National Alumni 1919
[4] 간행물
[5] 문서 셀クラエス
[6] 서적 The Great Events by Famous Historians, vol XI, A.D. 1609-1660 The National Alumni 1919
[7] 서적 폭스의 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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